생명을 연장하고 삶의 변화를 유도하는 혁신 신약은 중증·희귀 질환을 극복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한국은 가격 인하에 집중된 약가제도 정책 효과로 혁신 신약의 환자 접근성이 낮은 편이다. 2023년 미국제약협회(phRMA)에서 발표한 글로벌 신약 접근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시장에서 첫 출시된 이후 한국에 1년 내 진입하는 신약은 비급여 도입까지 포함해도 5%에 불과하다. OECD 평균은 18%, 일본 32%인 것을 감안해도 낮은 수치다. 건강보험 급여 적용 등 현실적으로 환자가 약을 쓸 수 있기까지는 평균 4년이 걸린다. 중증·희귀 질환의 치료 보장성 문제는 올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지적됐다.
급여 희망 고문에 애타는 환자들
혁신 신약의 치료 대상이 되는 환자들 역시 급여화를 애타게 기다린다. 30대 여성 A씨는 2019년 딸을 출산한 직후 젊은 나이에 삼중음성 유방암 3기를 진단받았다. 유방암 중에서도 전이와 재발 위험이 높고 진행 속도가 빨라 A씨 역시 진단 후 4년 만에 뇌와 뼈까지 전이돼 4기 판정을 받았다. 지난해 이 질환의 유일한 치료제인 ‘트로델비’가 국내 허가를 받았지만 현재 비급여 상태다. 월 약 1000만원의 치료비가 드는 현실에 그는 “가족을 힘들게 하면서까지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끝없이 든다”고 말했다. 올 초 트로델비의 급여화를 촉구하는 청원이 두 차례 올라와 10만 명의 동의를 얻을 정도로 많은 환자가 도입을 염원하고 있는 약제다.
폐가 점점 굳어가는 폐섬유증을 진단받은 50대 남성 B씨 또한 신약 치료만이 희망인 상황이다. 특히 B씨는 폐섬유증이 계속 진행되는 진행성 폐섬유증에 해당되는데, 폐 기능이 비가역적으로 저하하면서 결국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심각한 질환이다. B씨는 호흡부전과 만성피로로 걷기만 해도 숨이 차고 체중이 15kg이나 빠지는 등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이 질환 치료제인 ‘오페브’가 2016년 국내에 도입됐으나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지 않아 환자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B씨는 “지금 규모의 약제비를 평생 부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암흑처럼 느껴진다”며 당장 복용 중인 약조차 그림의 떡처럼 느껴지는 현실을 토로했다.
환자가 치료 현장에서 신약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건강보험 급여가 이뤄져야 하고 신약이 급여에 등재되기 위해서는 약제의 경제성 평가를 받는 과정에서 ICER값 임계치 내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현행 ICER값 기준은 10년 전 기준으로 맞춰져 있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높다. ICER값은 기존 약제 대비 효과를 개선한 신약의 경제성을 평가하기 위한 지표다. 신약을 통해 환자의 생존 기간을 연장하거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추가 비용을 나타낸다. 낮은 ICER값으로 비용 절감에 집중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치료 보장성 높이던 경평생략 대신 유예?…혁신 신약 우대 의지 보여줄 때
혁신 신약 도입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중증·희귀 질환에 한해 경제성 평가를 생략하는 경제성 평가 생략 제도(경평생략)가 주목받았다. 경평생략 제도는 대체 약제가 없거나 환자 수가 적어 경제성 평가가 어려운 희귀 질환 및 항암제의 특성상 평가를 면제하는 대신 약가 참조 대상인 8개국(A8 국가)의 조정 최저가를 참조해 급여를 등재해 주는 제도다. 경평생략은 중증·희귀 질환 특성상 신약 도입이 어려운 상황에서 환자의 치료 보장성을 높이는 역할을 했왔다. 실제 경제성 평가 면제 제도를 통해 그동안 42개 희귀·난치 질환 분야 신약이 도입되기도 했다.
이렇게 경평생략을 통해 국내 도입되는 중증·희귀 질환 분야 신약이 늘면서 경평생략을 통한 비용효과성 평가 비율이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경평생략 약제비와 환자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경제성 평가 제도 개선 방안 마련 연구결과를 토대로 중증·희귀 질환에 대해 그동안 생략했던 경제성 평가를 유예하는 방안 도입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성 평가의 적용이 생략에서 유예로 바뀌면 그나마 국내 도입되던 중증·희귀 질환 신약의 숨구멍까지 막힐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국내 약가제도는 국제적으로 비교했을 때 등재 기준이 까다롭고 급여 이후에도 사후관리 등 중복적 약가 인하 기전이 연달아 적용돼 신약이 신속하게 도입되기 어려운 구조”라며 “사실상 경평 면제에서 유예로 축소안이 적용되면 환자 수가 적은 희귀 질환 약제는 등재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의 신약 건강보험 등재율은 75%(2022~2023년)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 신약 등재율인 80.3%보다 더 떨어졌다. 혁신 신약의 국내 도입이 늦어지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환자다. 신약 접근성을 높여 실질적인 치료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정부의 전향적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권선미 기자 kwon.sunm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