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부자들’에서 정치 깡패 안상구(이병헌 분)는 잘린 팔을 대신해 의수(義手)를 찬다. 기자회견 중에 의수를 스스로 돌려 빼는 장면은 관객을 사로잡는 장면이었다. 만약 의수를 통해 감각을 느끼고,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였다면 어땠을까? 영화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런 장면은 더 이상 ‘상상’이 아니다. 감각을 느끼는 로봇 팔, 척수마비 환자를 걷게 하는 로봇은 실험실 바깥에서 상용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신경과학·기계공학 등 첨단과학이 접목된 재활로봇이 고령자·장애인의 삶을 바꾸는 키워드로 주목받고 있다.
“우리가 악수하고 있는 게 느껴지나요?” “물론이죠. 언제든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 10월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열린 백악관 프런티어스 콘퍼런스(White House Frontiers Conference)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나탄 코프랜드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물었다. 12년 전 교통사고로 척수를 다친 그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었다. 그런 그가 내민 건 자신의 손을 대신해 뇌와 연결된 ‘로봇 팔’이었다. 머리에 박힌 작은 칩이 뇌에 흐르는 미세한 전극을 감지해 내고, 이를 컴퓨터가 분석해 로봇 팔을 움직였다. 피츠버그대 재활의학과 로버트 건트 교수는 “코프랜드는 자신의 의지로 손을 움직이고 물건을 집는다. 눈을 가리고도 80% 넘는 확률로 어떤 손가락을 잡는지를 알아낸다”고 말했다.
척수 장애인 손 감각 되살려
재활의학은 예방, 치료에 이은 제3의 의학이라 불린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재활을 “신체, 감각, 지능, 사회적 기능을 유지하고 향상시키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활동이 불편한 고령자나 장애인의 경우 자신의 힘과 의지로만 재활에 나서기엔 한계가 있다. 이를 돕는 게 재활기기다. 휠체어나 목발은 다리가 불편한 환자의 이동을 돕고, 인공관절이나 시력보정용 렌즈는 신체기능을 회복시키는 동시에 다른 부위의 기능 악화를 예방한다.
최근에는 생물학을 기반으로 의학, 전기·전자, 기계가 결합한 ‘바이오닉스’ 분야가 급성장하면서 재활기기의 성능과 역할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바이오닉스는 쉽게 말해 ‘재활 로봇’이다. 국내 일부 병원에선 근골격계 수술 후 환자의 물리치료에 도입해 활용하고 있다. 국립재활원은 연구 목적으로 스위스 호코마사의 상지(上肢) 재활로봇(Armeo Power)을 설치했다. 팔목, 팔꿈치, 어깨 등 세 부분의 관절 가동 범위를 입력하면 로봇이 이 범위 내에서 동작하며 환자 재활을 돕는다. 환자가 고된 재활 과정을 즐길 수 있도록 물건을 집어 다른 쪽으로 옮기는 게임을 접목한 게 독특하다. 국립재활원 김호진 공업연구관은 “뇌졸중·척수손상 환자처럼 몸을 가누기 어려운 환자의 재활에 효과적이다. 사람이 돕는 기존 방식에 비해 안전하고 환자 참여도가 높다”고 장점을 설명했다.
재활 로봇은 기계·전자공학이 발전하면서 점차 소형화·경량화하고 있다. 이런 추세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행사가 지난 10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렸다. ‘사이보그 (인간+기계)’ 올림픽이라 불린 사이배슬론(cybathlon)이다. 참가 선수(파일럿)는 모두 장애인으로, 자신의 신체 능력을 보조하
는 첨단 과학을 입고 경쟁에 나섰다.
제1회 사이보그 올림픽 열려
이 대회는 스위스 취리히연방공과대 로버트리너 교수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그는 2012년 로봇 의족을 찬 채 미국 시카고의 103층 빌딩을 45분 만에 오른 잭 보터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리너교수는 “바이오닉스 기술이 실용화되기 위해선 갈 길이 멀다. 사이배슬론을 통해 기술개발이 가속화되기를 바란다”고 개최 의도를 설명했다.
이번 대회에선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rain Computer Interface)를 비롯해 전기 자극 자전거(Functional Electrical Stimulation Bike), 로봇 의수(Powered Arm), 로봇 의족(Powered Leg), 입는 로봇(Powered Exoskeleton), 기능성 휠체어(Powered Wheelchair) 등 모두 여섯 종목의 경기가 치러졌다.
로봇 의수를 찬 파일럿은 빨래 널기, 칼질하기 등을, 기능성 휠체어를 탄 파일럿은 장애물 통과하기, 언덕 올라 문 열고 들어가기처럼 실제 생활에서 마주치는 문제를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하는지를 겨뤘다.
전기 자극 자전거 경주 종목은 하반신이 움직이지 않는 척수마비 환자가 파일럿으로 참여했다. 프랑스 아마추어 사이클 선수 반스 베르제롱은 2013년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지만 근육의 각 부위를 자극하는 기능적·전기적 자극(FES)을 통해 다리 힘을 일반 사이클 선수의 10분의 1 수준(20와트)까지 끌어올린 뒤 경기에 나섰다. 이런 기능적·전기적 자극은 국내 병원에서도 약해진 근골격계 능력을 높이는 데 활발히 활용되고 있다. 보통 재활 로봇은 근육이 움직일 때 발생하는 전기를 센서로 측정해 운동 의도를 감지하고, 기계장치에 달린 모터와 액추에이터(압력으로 작동하는 피스톤·실린더)가 움직임을 보조하는 식으로 동작한다. 이를 극대화시킨 게 입는 로봇(외골격 로봇)이다.
영화 ‘아이언맨’에서 주인공이 착용하는 슈트와 비슷하다. 이번 대회에서는 앉기와 서기, 징검다리 건너기 등 모두 여섯 가지 미션을 수행했는데, 우리나라에는 서강대 기계공학과, SG메커트로닉스, 세브란스 재활병원 공동연구팀이 전체 3위를 차지했다.
가슴에 무선 송신기 달아 소통
입는 로봇은 재활 목적은 물론 신체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군사·산업용 목적으로도 활발히 개발되고 있다. 한국생산 기술연구원이 제작한 군사용 로봇 ‘하이퍼(HyPER)’는 120㎏의 짐을 짊어지고도 걸을 수 있도록 개발됐다. 100㎏이 넘지만 일단 착용하면 로봇이 하중을 받쳐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최근 일본에선 공항 버스터미널 수하물 작업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할(HAL)’이라는 이름의 입는 로봇을 가동 중이다. 유럽연합(EU) 산하 7개국 과학자들은 2019년 개발을 목표로 바지처럼 입는 로봇 ‘엑소소프트(XoSoft)’를 만들고 있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종목은 게임 속 아바타를 손이 아닌 머리(뇌파)로 조종해 장애물을 피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앞서 오바마와 악수한 피츠버그대의 ‘로봇 팔’이 좋은 예다. 과거에는 모자나 머리띠처럼 머리에 착용해 뇌파를 감지하는 간접적인 방법이 주를 이뤘지만 지금은 뇌에 전극을 직접 삽입해 신호를 잡아내는 ‘뇌 임플란트’ 연구가 활발하다. 뇌 신경세포(뉴런)는 행동을 하거나 감각을 느낄 때 전기를 통해 신호를 교환한다. 이를 기본으로 개발되는 것이 ‘뇌 임플란트’다. 김호진 연구원은 “뇌파는 신호가 얕고 넓어 실제 환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이를 뉴런 단위로 구분하면 보다 정확히 원하는 생각과 행동을 파악할 수 있고, 역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CNN 등 외신은 지난달 네덜란드의 한 60대 루게릭병 환자가 ‘뇌 임플란트’를 통해 의사소통 능력을 되찾았다고 보도했다. 그는 온몸의 근육이 마비돼 목에 관을 뚫어 호흡할 만큼 상태가 나빴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 의대 닉 램지 교수팀은 지난해 10월 수술을 통해 환자의 뇌 운동피질에 전극을 삽입한 뒤 이를 가슴에 달린 무선 송신기와 연결했다. 이 신호를 외부의 태블릿PC로 보내 생각만으로 글자를 쓸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환자는 200일쯤 훈련을 받았는데 1분에 2개단어를 입력하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최근에는 뇌 임플란트로 다리를 움직이는 기술도 동물실험에서 성공했다. 스위스 취리히연방공과대 연구팀은 척추가 손상된 원숭이의 다리 운동을 담당하는 뇌 운동피질에 전극을 삽입하고 이를 해석해 끊어진 척수 아랫부분에 무선 송신하는 기술로 원숭이를 정상적으로 걷게 만들었다. 김호진연구관은 “재활 로봇의 개념은 거의 100년전부터 제시됐다. 의학·신경과학·기계공학 등 각 분야를 얼마나 잘 융합해 무슨 새로운 콘셉트를 잡느냐가 재활 로봇 기술 발전의 관건이 될 것”이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