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소 농구와 축구 같은 격한 스포츠를 즐기는 김수혁(33·가명)씨는 며칠 전 죽을 고비를 넘겼다. 출근을 하던 중 가슴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다행히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즉시 발견돼 적절한 심폐소생술을 받은 덕에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김씨는 의사에게 부정맥이 원인이었다고 얘기했다. 누구보다 건강을 자부하던 그였기에 오전의 사건과 의사의 진단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평소 심장에 별 문제가 없고 건강한 사람이라도 갑자기 심장마비 같은 위급한 상황에 이를 수 있다. 심장이 고유한 리듬을 잃어버린 '부정맥' 때문이다.
급성 심근경색과는 다르다. 심근경색은 혈전(피가 굳은 덩어리)이 심장에 공급하는 혈관을 막아 발생하는 질환이다. 부정맥과 같이 돌연사의 주요 원인 중 하나지만, 고혈압이나 비만, 운동부족 같은 위험인자가 있어 그나마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부정맥은 다르다. 여간해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평소 꾸준히 심장 리듬을 확인하지 않는 한 발견하기 힘들다.
부정맥에 의한 심장마비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지난 2000년 프로야구 경기 도중 쓰러져 약 10년 만에 세상을 떠난 故 임수혁 선수의 병명도 부정맥이었다. 2011년엔 프로축구 선수 신영록씨가 경기 중 쓰러지는 사건도 있었다. 역시 원인은 부정맥이었다.
심장 리듬 망가지는 ‘부정맥’
이렇게 젊고 건강한 사람을 한 순간에 쓰러뜨리는 부정맥이란 무엇일까. 원래 심장은 1분에 60~100번 뛰도록 설계됐다. 횟수보다 중요한 건 리듬이다. 부정맥은 이 리듬이 깨진 상태다.
일정한 리듬에 엇박자가 생기는 건 심장을 뛰게 하는 전기시스템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거대한 근육 덩어리인 심장은 전기신호를 받아 수축한다. 우심방에 위치한 ‘동방결절’이라는 곳에서 만들어진 전기는 특수한 섬유를 타고 심장 전체에 퍼진다. 이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혹은 느리게 뛴다.
뛰는 속도가 빨라지면 그만큼 과도하게 운동한 심장에 무리가 온다. 이로 인해 가슴통증과 호흡곤란이 찾아온다. 반면, 심장이 늦게 뛰면 혈액이 잘 공급되지 않아 어지럼증이 생기고 심지어는 실신할 수도 있다. 둘 다 돌연사의 주요원인이다.
물론 건강한 사람도 특별한 상황에 처하면 심장이 빠르게 혹은 느리게 뛸 수 있다. 그러나 면접을 앞둔 상황도 아니고, 멋진 이성과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뛴다면 부정맥을 의심할 수 있다. 이유 없는 엇박자가 자주 반복된다는 건 심장에 이상이 생겼다는 신호다.
스트레스 심하면 갑자기 쓰러질 수도
부정맥의 원인은 다양하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하게 태어났을 수 있다. 술이나 담배, 카페인, 불충분한 수면이 전기시스템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고혈압이나 독감바이러스가 원인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원인은 스트레스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장 질환을 일으킨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배우자와 사별한 사람은 심장병으로 사망할 확률이 일반인보다 2배 이상 높고, 지진·테러 같은 재난을 겪은 뒤 급성 심장마비가 증가했다는 보고도 있다. 스트레스가 심하다면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요즘처럼 일교차가 큰 날씨엔 부정맥 위험이 더욱 크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김호 교수팀이 2008~2011년 서울에서 부정맥으로 응급실을 찾은 3만명을 조사한 결과 일교차가 1℃ 증가할 때마다 부정맥에 의한 응급실 방문이 1.8배 증가했다. 갑자기 변하는 기온에 인체가 적응하는 과정에서 심장에 무리를 주기 때문이다.
부정맥으로 쓰러졌을 땐 응급처치가 매우 중요하다. ‘골든타임’은 4분이다. 임수혁 선수와 신영록 선수의 생사가 엇갈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5분 이내에 심폐소생술을 받으면 생존율이 80% 이상이다.
그러나 때를 놓치면 임수혁 선수처럼 뇌에 피가 공급되지 않아 뇌기능이 정지된다. 단순한 심폐소생술로는 정상 혈류량의 20%만 심장으로 공급되는 반변, 제세동기(전기충격기)를 사용하면 본래의 심장 리듬을 찾을 수 있어 더욱 좋다.
부정맥은 대부분 완치할 수 있다. 증상이 심각하더라도 심박조율기나 체내형 제세동기를 사용하면 돌연사를 막을 수 있다. 증상이 심하지 않다면 심장을 빠르게 또는 느리게 하는 약을 먹는다.
다만, 약을 복용할 땐 주기적으로 전문의와 상의하는 게 중요하다. 세브란스병원 심장내과 홍그루 교수는 “부정맥 약은 양날의 검과 같다”며 “잘못된 방법으로 복용했을 땐 오히려 돌연사 위험을 높인다. 권씨 사례 역시 약의 부작용이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예방이다. 평소 심장을 위해 술과 카페인 섭취를 줄여야 한다. 담배를 끊고 체중조절도 필요하다. 스트레스를 피하고 무리하지 않게 규칙적으로 운동하면 좋다.
평소 부정맥을 앓고 있었다면 지나치게 격렬한 운동은 피해야 한다. 오히려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어서다. 땀이 조금 날 정도로 하루 30분 이상 일주일에 3회 이상 하는 게 좋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